[신화망 포토시 3월3일] "내 몸속에 흐르는 피가 마치 고향을 위해 울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은퇴한 광부 훌리오 레예스(67세)가 혼잣말을 했다.
레예스의 고향 포토시는 평균 해발고도가 4천m 이상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시 중 하나로 영광과 비극으로 점철된 역사를 지닌다.
◇'은 편자'의 도시에서 '최낙후' 도시로
1545년 포토시에서 거대한 은광이 발견되자 이곳을 점령한 스페인 식민주의자들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생산량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현지 은 생산량은 세계 전체의 약 절반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때 '황량한 산과 라마'밖에 없었던 포토시는 불과 몇십 년 만에 10만 명 이상의 주민이 거주하는 번화한 도시로 발전했다. 당시 런던과 파리와 맞먹는 규모다.
우루과이 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그의 작품 '수탈된 대지-라틴 아메리카 500년사(원제: 라틴 아메리카의 노출된 혈관들(Open Veins of Latin America))'에서 "편자마저 은으로 만들어졌다"는 표현으로 포토시 극강의 화려함을 묘사했다.
그러나 이곳의 부는 오로지 식민주의자들의 몫이었을 뿐 수 대에 걸쳐 이 땅에 거주해 온 원주민들은 개발로 인한 비참한 결과를 겪어야만 했다.
약 300년 후 식민주의자들이 떠난 광산에는 은이 거의 남지 않았다.
오늘날 포토시는 남미에서 최낙후 도시 중 하나다. 그뿐만 아니라 과거 수은을 이용한 은 제련 공정은 많은 독성 가스와 폐수를 발생시켜 대규모 지역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부유한 도시에서 빈곤 도시로
포토시의 영광과 비극 모두 해발 약 5천m에 위치한 광산에서 벌어진 일과 큰 관련이 있다.
은광 때문에 '세로 리코(부유한 산)'로 불리던 이 산의 붉은 비탈면에는 레예스의 얼굴 주름처럼 흰 자국이 무수히 남아 있다. 이 지워지지 않는 흉터는 서양의 개발과 약탈로 인한 역사를 보여준다.
"당시 원주민에게 이곳은 마치 '지옥의 입' 같았습니다." 현지 가이드 조니 몬테스의 말이다. 오늘날에도 포토시 광부들의 평균 수명은 약 40세에 불과하다.
갈레아노는 "인간과 물질 자원의 무분별한 수탈은 한때 가장 부유했던 곳이 이젠 가장 가난한 곳이 되는 모순을 가져왔다"며 "포토시는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주의 체제 때문에 피로 얼룩진 상처이자 고발의 증거로 여전히 남아 있다"고 했다.
◇오직 죽음만이 유일한 안식
포토시에 위치한 볼리비아 국립 조폐국 역사기록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18세기 중반 문서는 당시 식민주의자들이 원주민에게 '미타(mita)'라고 불리는 공공 노역을 강요했음을 개괄적으로 보여준다. 미타는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 Programme)에 등재된 제도이다.
스페인 식민주의자들은 '미타 제도'를 시행해 원주민들이 매년 식민 당국에 정해진 양의 노동을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이 노동에는 주로 광업 및 관련 작업이 포함됐으며 극도의 열악한 조건에서 하루 최대 18시간의 작업을 해야만 했다. 많은 사람에게 죽음만이 유일한 안식이었다.
식민주의자들은 포토시를 '노다지'로 여기고 극도로 잔인한 강제 노동을 통해 세계 역사상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부의 축적을 이뤘다.
수많은 원주민의 목숨을 대가로 얻은 식민주의자들의 호의호식이었다.
한편 포토시에서 생산된 은은 스페인 왕실이 오랜 기간 벌인 전쟁의 중요한 자금원이 됐다. 16세기 카를로스 1세와 펠리페 2세가 통치한 스페인 제국은 세계 곳곳에 퍼져 있는 식민지를 자랑하며 '황금세기'로 이름을 높였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는 별명을 자랑했던 대영제국보다 두 세기 앞서 스페인 제국이 먼저 '나의 영토에는 해가 지지 않는다'고 주장했을 정도다.
라틴 아메리카인의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본 갈레아노는 "유럽은 현대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착취하는 데 크게 의존했다"며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원주민 공동체의 역경은 라틴 아메리카 전반에 걸친 비극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사그라지지 않는 혁명의 불꽃
18세기 후반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 혁명이 변화의 물결을 일으키자 라틴 아메리카인들도 깨어나기 시작했다.
1809년 7월 16일 라파스에서 혁명이 발발해 옛 식민 체제를 불태우는 불길로 이어졌다.
스페인 식민지 군대의 공격에도 혁명의 불꽃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 1825년 8월 6일 볼리비아가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10월에는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가 포토시에 도착해 사람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세로 리코에서 얻은 경제적 뒷받침과 포토시 주민의 기여가 없었다면 독립 전쟁이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포토시 시립박물관의 큐레이터인 셰일라 벨트란의 설명이다. 그는 이어 볼리바르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며, "현재 우리의 자랑스러운 나라의 국명인 '볼리비아'는 '볼리바르'에서 유래됐다"고 전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일궈가는 미래
포토시의 '세로 리코'에서 서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해발 3천m 이상의 고지대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리튬 광산 중 하나인 우유니 염전이 위치해 있다.
은과 같은 모양을 지닌 리튬은 최근 국제 시장에서 매우 중요한 광물 자원이다. 미국 지질조사국의 자료에 따르면 볼리비아의 리튬 보유량은 현재 세계 1위다.
2023년 3월 루이스 아르세 볼리비아 대통령은 로라 리처드슨 미국 남부사령부 사령관이 리튬 광산 개발에 있어 볼리비아와 기타 라틴 아메리카 국가의 국제 협력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을 규탄했다. 아르세 대통령은 "가격이 자국 경제에 이롭게 형성되도록 시장에서 주권적으로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정한 번영은 오직 진정한 독립에서 비롯된다. 이는 볼리비아 사람들이 포토시의 역사로부터 배운 깊은 교훈이다.
페르난도 우아나쿠니 전 볼리비아 외교부 장관은 외부의 간섭과 헤게모니는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이끌어 낼 수 없다며 남남협력(개도국 간 협력) 강화가 '민주화와 통합의 열쇠'라고 말했다.
2023년 8월 말 브릭스(BRICS) 국가들이 회원국 확장에 동의하자 아르세 볼리비아 대통령은 볼리비아가 BRICS 국가들의 전략적 파트너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우아나쿠니 전 장관은 신흥시장과 개발도상국들이 BRICS에 가입함으로써 국가 주권과 경제적 독립을 수호하면서 발전을 함께 추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요즘 볼리비아 국립 조폐국 박물관은 관람객들, 특히 어린 학생들로 북적인다. 박물관 책임자인 루이스 아란시비아는 식민지 역사에 대한 비판적 해석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식민주의자들이 우리 선조들과 우리 땅에 가져온 피해를 인식했을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앞으로 전진해 나아갈 수 있다"고 전했다.
원문 출처:신화통신 한국어 뉴스 서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