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일 사영승(가운데) 씨 등이 심양 항미원조 열사능원을 찾아 가족을 추모하고 있다.[촬영/신화사 기자 리강(李鋼)]
[신화망 심양 4월5일] 중국 하북성 패주시 십간방(十間房)촌에 사는 사영승(史榮升∙76) 씨는 올해 청명절에 고향의 특산물인 떡과 참외를 가지고 패주에서 700여km 떨어진 료녕성 심양에 가서 여태까지 본 적이 없는 가족을 만났다.
심양 항미원조 열사능원에는 사영승 씨의 부친(스완중 열사)을 포함해 938위의 중국인민지원군 열사 유해가 안장돼 있다.
사영승 씨는 아버지를 뵌 적이 없고 어머니(왕봉란)에게서 자신과 아버지가 많이 닮았다는 얘기만 들었다. 당시 22살이던 아버지가 집을 떠난 해인 1948년 딸 사계영은 3살이었고 아들 사영승은 아직 뱃속에 있었다. 어머니는 1950년 당시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정치부가 보내온 혁명군인 증명서를 받았다. 증명서에 찍힌 낙관은 ‘1950년 9월 25일’이었다. 이는 아버지가 소속돼 있던 부대가 조선에 들어가 참전하기 직전이었다. 불과 2년 뒤 가족의 평안을 기대하던 어머니가 받은 건 남편의 혁명열사 증명서였다.
그 후 수십 년간 사 씨 집안 사람들은 그가 입대한 부대에 가서 소식을 묻기도 하고, 지도를 보면서 그가 죽었을지도 모를 지리적 위치를 추측하기도 했다……하지만 여건상 가족의 유해를 찾아오려는 사 씨네 가족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91살이던 2016년 임종을 앞두고 아들에게 “아버지를 모시고 오너라”는 말을 남겼다.
조국은 이국 타향에 묻힌 영웅의 아들딸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2014년부터 지금까지 10차례에 걸쳐 모두 938위의 재한 지원군 열사 유해가 조국으로 돌아왔다. 중국 퇴역군인사무부는 영웅을 ‘귀국’에서 ‘귀가’로, ‘무명’에서 ‘유명’으로 만들기 위해 2019년 전국적으로 ‘영웅 찾기’ 캠페인을 벌여 열사 가족 찾기 단서를 속속 발표하고 사회 각계각층의 역량을 동원해 함께 열사 가족을 찾아 영웅과 가족들이 한데 모일 수 있도록 했다.
2022년 어느 여름날 집에서 일을 하고 있던 사영승 씨는 패주시 퇴역군인사무부 직원으로부터 “사만충 씨의 유해가 귀국했을 수도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유해 찾기에 마침내 실마리가 잡힌 것. 2021년 제8차 재한 중국인민지원군 열사 유해와 함께 귀국한 유품 가운데 ‘사만충’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도장이 있었다. 3개월 후, 사영승 씨는 큰아들 사준표 및 사촌 형 두 명과 함께 추가 검사를 위해 현에 가서 DNA를 채취했다.
퇴역군인사무부는 유품 징후와 사회 조사, 군사 논증 및 DNA 대조 등을 거쳐 2024년 1월 재한 지원군 열사 가족 찾기 성과를 발표하면서 열사 10위의 신원을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사만충 열사도 포함됐다. 스룽성 씨는 “국가가 아버지를 찾아줘 어머니의 한을 풀었다”면서 확실한 소식을 들은 그 순간 눈물이 앞을 가렸다고 했다.
4월 3일 심양 항미원조 열사능원을 찾아 열사의 이름이 새겨진 벽 위에 있는 아버지의 이름을 가리키는 사영승 씨의 손가락이 떨렸다. 7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추모였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오셨다”며 “오늘 드디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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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사만충(史萬忠) 열사 유품 진열장 앞에서 사영승(오른쪽 첫 번째) 씨 등이 유품을 살펴보고 있다.[촬영/신화사 기자 리강(李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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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만충 열사 유품 진열장 안의 도장(오른쪽)과 버클만 남은 벨트(4월 3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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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사영승 씨가 스완중 열사 유품 진열장 앞에 서 있다.[촬영/신화사 기자 리강(李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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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심양 항미원조 열사능원을 찾은 사영승 씨(왼쪽에서 두 번째) 등이 열사의 이름을 새긴 열사영명장(烈士英名墻)을 쳐다보고 있다.[촬영/신화사 기자 리강(李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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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심양 항미원조 열사능원을 찾은 사만충 열사 가족이 열사영명장(烈士英名墻)에서 가족의 이름을 찾고 있다.[촬영/신화사 기자 리강(李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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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심양 항미원조 열사능원을 찾은 사만충 열사 가족이 열사영명장(烈士英名墻)에서 가족의 이름을 찾고 있다.[촬영/신화사 기자 룽레이(龍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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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심양 항미원조 열사능원을 찾은 사만충 열사 가족이 열사영명장(烈士英名墻)에서 가족의 이름을 찾고 있다.[촬영/신화사 기자 리강(李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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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심양 항미원조 열사능원을 찾은 사영승 씨가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진 열사영명장(烈士英名墻)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있다.[촬영/신화사 기자 리강(李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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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심양 항미원조 열사능원을 찾은 사영승 씨가 열사영명장(烈士英名墻) 위 부친의 이름을 붉은 천으로 살살 닦고 있다.[촬영/신화사 기자 리강(李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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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심양 항미원조 열사능원을 찾은 사영승 씨가 부친을 추모하고 있다.[촬영/신화사 기자 리강(李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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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심양 항미원조 열사능원을 찾은 사만충 열사의 손자 사준동(史俊同)이 할아버지를 추모하며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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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심양 항미원조 열사능원을 찾은 사영승 씨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촬영/신화사 기자 리강(李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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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 항미원조 열사능원에서 촬영한 사영승 씨(왼쪽)의 뒷모습(4월 3일 촬영).[촬영/신화사 기자 리강(李鋼)]
원문 출처:신화통신